목록으로

성경과 신학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기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현대적 이해를 재고한다

by 이춘성2024-01-04

신들림의 시간”에 이어서 읽으면 더 좋습니다. 

많은 분이 레이첼 카슨이 1962년에 쓴 침묵의 봄을 아실 것입니다. 이 책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살충제와 제초제로 사용된 DDT로 인한 환경 파괴의 심각성을 세상에 알려, 미국과 전 세계에서 환경 운동이 일어나게 된 계기가 된 역사적으로 중요한 책입니다. 하지만 이 책이 출판되고 5년 뒤인 1967년, 기독교와 교회는, 스탠퍼드 대학에서 중세 유럽의 농업 기술사를 가르치던 린 화이트 주니어가 쓴 ‘생태계 위기의 역사적 기원’이라는 짧은 논문을 통해서 현대 환경 파괴와 생태 위기의 기원으로 지목되는 불명예를 당하게 됩니다. 이후 기독교와 교회가 환경 파괴와 기후 위기의 주범이라는 그의 주장은 대부분의 학자들과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져 지금까지도 변하지 않는 사실처럼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화이트의 글에 따르면, 기독교가 환경 파괴의 주범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기독교의 자연관이 문제였습니다. 기독교는 자연을 대상이나 도구로 여겨 착취의 대상으로 삼았다고 합니다. 둘째, 인간 중심주의가 문제였습니다. 기독교는 인간을 단순히 자연의 일부가 아니라, 신의 형상을 따라 만들어진 구별된 존재로 보았고, 이로 인해 인간이 자연을 착취하는 것을 정당화했다는 것입니다. 셋째, 기독교의 하나님에 대한 신론을 비판했습니다. 힌두교 같은 동양 종교의 범신론과 달리 기독교는 자연을 신의 일부로 여기지 않아 자연을 함부로 착취했다는 것입니다.


놀랍게도 이러한 주장은 당시 반전 운동을 하던 히피들을 포함한 젊은이들과 지성인들에게 쉽게 수용되었으며, 반전 운동은 환경 운동과 통합되어 새로운 형태의 평화주의를 탄생시켰지요. 그리고 이들은 평화의 적으로 기독교와 교회를 지목했습니다. 이런 이유로, 1960년대 서양 교회에서는 젊은이들이 교회를 급격하게 떠나는 ‘탈교회’ 현상이 두드러졌습니다. 당시 교회를 떠난 젊은이들은 동양 종교, 특히 인도의 힌두교와 동남아 및 일본의 선불교에 매료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1960년대 큰 인기를 끌었던 비틀즈와 같은 유명인들은 1968년 인도를 방문해 마하리쉬 요기를 만나서 초월명상법을 배워 돌아왔습니다. 이후에도 서양의 많은 대중 가수들과 배우들이 인도를 찾아 초월명상을 배웠습니다. 이러한 동양 종교의 명상을 돕기 위해 동양 음악을 차용한 음악 장르가 탄생했는데, 이것이 바로 뉴에이지 음악입니다.


환경 파괴, 전쟁, 핵무기, 과학 기술에 대한 회의, 동양 종교에 대한 관심, 평화주의, 반전 운동 등으로 1960년대 서양은 공포와 혼란이 지배하던 시대였습니다. 기독교는 이 모든 혼란의 주범으로 젊은이들과 지성인들에게 비판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결과적으로 기독교 내부에서는 신론, 창조론, 인간론에 대한 신학적 반성이 일어났고, 일부는 수정되기도 했습니다. 특히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극단적인 실존적 이해와 관계론적 이해가 대두되었습니다. 현재 우리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는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관계론적 이해는 20세기의 이해 방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삼위 하나님의 사랑의 관계가 인간의 하나님 형상의 참 의미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은 관계 속에서만 의미를 찾을 수 있고, 관계성 안에서 자신의 실존을 깨달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20세기 실존주의적 인간 이해와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이해는 이전의 교회와 기독교가 이해해 온 인간에 대한 이해와는 거리가 있습니다.


종교개혁 이후 대표적인 두 신앙 고백인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과 하이델베르크신앙고백은 인간에 대해 현대와는 다른 이해를 제시합니다.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의 소요리 문답 첫 번째 질문은 “사람의 가장 중요한 목적이 무엇인가요?”라고 묻고, “사람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를 즐겁게 하는 것입니다”라고 답합니다. 하이델베르크신앙고백의 6번 답은 “하나님은 사람을 선하게, 그리고 자신의 형상으로 창조하셨습니다. 이는 사람이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마음으로 사랑하며, 그와 함께 영원한 복락 속에서 살고, 그에게 찬양과 영광을 돌리기 위함입니다”라고 말합니다.


20세기 이전의 신학에서는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존재한다는 것이 관계라는 피상적인 개념으로 정리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분명한 목적이 있었습니다. 즉,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즐겁게 하는 것, 하나님을 창조주로 바르게 알고 사랑하며, 그와 함께 살고, 그를 찬양하며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신앙고백에서 하나님과의 관계성은 하나님의 형상의 일부일 뿐 전부는 아닙니다. 오히려 이 관계를 바르게 설정하고 유지하는 것에 초점을 맞춥니다. 감각적인 표현, 즉 관계성이 연결되었는지, 끊어졌는지에 대한 집중보다는, 연결성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광스럽게 할 때, 따라오는 결과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현대인에게 이것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즉, 터치가 먼저이고, 그 후에 거룩함과 영광이 따른다는 것이지요. 특히 개신교인인 우리가 존귀하게 여기고 지켜야 할 교리인 ‘오직 은혜’, ‘오직 믿음’의 교리는 실존적이고 관계적인 의미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설명할 수 없는 실존적 관계성, 일종의 신비한 종교적 체험이 은혜와 믿음의 증거라는 것이지요. 만약 이러한 터치를 경험했다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것,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은 뒤로 미뤄져도 좋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개신교인들의 실존주의적 신앙의 능력 없고 고민 없는 삶을 보면서, 개혁파 신학자 바빙크는 로마가톨릭보다도 못한 개신교인들의 모습에 대해서 이러한 한탄을 남겼습니다. 


“그러한 경건함이 거짓된 원칙즉, 행위로 말미암은 의로움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께 가치가 없다고 즉시 단언하는 것은 우리로서는 멀리해야 한다. 그러한 판단이 정말로 많은 진리를 담고 있더라도, 우리는 그것을 말하기 전에 개신교의 좋은 교리로 말미암은 의로움보다 가톨릭의 행위로 말미암은 의로움이 훨씬 낫다는 것을 상기해야 한다.”(Refomed Ethics 1, 44) 


베드로는 인간이 하나님의 현상인 이유를 창세기 1장과는 다른 관점으로 설명합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벧후 1:4). 이것은 우리의 타락과 구원과 성화, 영화라는 구원 역사의 관점에서 조망한 인간의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이해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존재지만, 인간의 타락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린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를 부르신 이를 앎으로 말미암음”(벧후 1:3)으로써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베드로의 미래적 설명은 우리가 아직도 하나님의 형상을 온전히 회복하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앞으로 우리는 “신성한(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존재가 되어야 하고, 그때에야 비로소 인간은 창조하신 하나님의 형상을 완전히 회복한다는 것이지요. 베드로는 이어서 이를 위해 성도들이 해야 할 것들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벧후 1:5-7).


하나님의 형상으로 사는 것은 하나님의 손을 꼭 잡았을 때, 어떤 에너지가 전달되어 자동으로 변화되는 만화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을 때, 온몸에 전율이 일어나 자동으로 다른 사람이 되는 공상 영화와도 다릅니다. 베드로의 이해에 따르면, 하나님의 형상으로 사는 것과 하나님의 형상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을 닮기 위한 ‘처절한 투쟁’에 가깝습니다. 믿음 안에서 거룩하고 덕스러운 삶을 살고, 옳은 길이 무엇인지 알기 위한 탐구하며, 지식 때문에 교만해지지 않도록 절제하고, 절제로 오래 기다리며 인내하며, 인내 속에서도 경건함을 포기하지 않고, 약한 다른 사람을 탓하지 않고 사랑을 더하는 삶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사는 사람의 삶이며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그러나 현대 그리스도인들은 너무 쉽게 자신이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자랑하며, 서로를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고 칭찬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형상은 종말에 자격 있는 자들에게 하나님이 불러주시는 칭찬이며, 상급에 가깝습니다. 우리가 지금 ‘하나님의 형상’이란 이름을 인간을 향해 부를 수 있는 유일한 이유는, 마치 우리를 미리 의롭다고 칭하시는 ‘칭의’의 은혜와 같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님의 신실함과 사랑 속에서 우리에게 보증해 주신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결코 당연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우리의 가벼운 이해를 재고해야 할 때입니다.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카카오톡으로 보내기
  • 공유하기
  • 공유하기

작가 이춘성

이춘성 목사는 20-30대 대부분을 한국 라브리(L'Abri) 간사와 국제 라브리 회원으로 공동체를 찾은 손님들을 대접하는 환대 사역과 기독교 세계관을 가르쳤다. 현재 분당우리교회 협동목사, 한국기독교윤리연구원(KICE) 사무국장으로 섬기고 있다.